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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이집트 문명의 역사
    카테고리 없음 2023. 4. 1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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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 문명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거대한 나일강이 선사한 찬란한 축복, 인류가 남긴 가장 위대한 고대의 흔적.

    이집트 수많은 미스터리와 신비함을 남긴 이 위대한 문명의 역사를 따라가 보시죠.

     

     

    이집트의 시작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기원전 4천 년 경,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나일강 일대에서 이집트는 시작되었습니다.

    지중해와 사하라 사막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거대한 강이 흐르는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 전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나일강은 다른 강에서는 찾기 힘든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요.

    매년 시계처럼 정확한 시기에 홍수와 범람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매년 5월에 내리는 폭우 때문에 물이 넘쳐흐르게 되고 이로 인해 나일강 일대의 땅은 굉장히 비옥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비옥한 강가에 농사를 짓는 루틴은 계속되었고 이집트는 고대 지중해 일대에서 가장 부유한 식량원이 됩니다.

    게다가 서쪽에 광대한 사하라 사막과 북쪽과 동쪽의 바다로 둘러싸인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자연조건을 활용하며 나일강변에 모여사는 각 씨족들이 연합하여 작은 소왕국들을 만들었고, 점차 소왕국들이 통합되어

    나일강을 중심으로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라는 두 개의 왕국이 생겨나게 됩니다.

    당시 상이집트의 왕은 백색 왕관을 썼고, 하이집트의 왕은 붉은색 왕관을 썼으며

    기원전 3100년 최초의 파라오인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이 둘을 합한 이중왕관을 쓰게 됩니다.

    메네스는 상·하이집트 왕국을 통일하고 양국의 경계점 멤피스에 새 왕도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집트 왕조가 시작됩니다.

     

    피라미드의 출현

    기자의 피라미드군 (Giza pyramid complex)

    이집트의 통일왕조는 고 ·중· 신왕국 시대로 부르고 혼란의 시기를 중간기로 부르고 있습니다.

    고왕국 시대는 제3왕조 파라오부터 시작된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로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제3왕조의 시조 제세르왕 때의 재상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이 이집트 최초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설계했고, 후세에 신격화되어 건축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우리가 아는 피라미드의 초기 형태로 기원전 2600년경 고왕국 제4 왕조를 시작한 스네프루 시대에 굴절 피라미드가 건설되었고, 이 굴절 피라미드로 공학적 경험을 쌓은 건축가들은 더 온전한 형태를 가진 붉은 피라미드를 완성해 냈습니다.

    스네프루 이후에 이집트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도 강해지니 후대 왕들은 피라미드를 더 높고 크게 짓기 시작했는데요.

    스네프루의 뒤를 이은 쿠푸왕과 카프레왕, 멘카우레 왕은 셋 다 기자 지역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습니다.

    그중 가장 큰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높이 152미터, 정방형의 전면적 대략 6헥타르, 기저의 각 변은 정확하게 네 방위를 가리키고 있으며, 이를 만들기 위하여 평균 2.5톤의 돌 230만 개를 쌓아 들었으며 총중량은 6백만 톤에 달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이 20년에 걸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대와 같은 중장비도 없던 시대에 이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정밀하게 건축한 방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가사의로 남아 있습니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에는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가진 거대한 스핑크스가 엎드려 있는데요.

    원래 어떤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해서 만든 후로 오랜 세월 피라미드 옆을 수호하게 됩니다. 

    이렇게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스핑크스 같은 최고의 건축물은 물론 그에 따르는 시설물들과 왕을 재현하는 현상들을 통해 파라오의 절대 권력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일찍부터 통일국가를 만들고 그 목적이 충족된 뒤에는 밑바닥에 잠재하고 있던 지방 세력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까요?

    귀족들은 점차 반독립적인 체제를 형성하고 파라오의 권위에 위협을 가하면서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파라오의 권한도 무너져갔습니다.

    파라오들은 권위회복과 재정 확보를 위해 원정을 되풀이하거나 귀족의 딸과 결혼하여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이러한 노력도 급속히 기울어지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6왕조 말기에는 멤피스 정부의 지배력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더불어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나일강의 기근이 닥치면서 500여 년 동안 계속되던 고왕국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혼란의 시대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 사이에는 혼란스러운 중간기들이 끼어있는데요.

    제1 중간기에는 극심한 가뭄과 기근 속에서 암흑시대가 펼쳐집니다.  나일강은 마치 거대한 사막처럼 변했고 상이집트에선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먹는 처참한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 지속되면서 민중은 폭동을 일으켰고 혼란한 중앙정부에선 수십 명의 파라오가 난립하게 됩니다. 

    제1 중간기에 혼란이 수습된 것은 제11 왕조 시기였는데요.  멘투호테프 2세가 통일에 성공한 이후를 중왕국 시대라고 합니다. 

    그는 기존 수도였던 멤피스보다 상류에 위치한 테베를 새 수도로 삼고 이집트를 통치하였지만 이 안정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674 년, 청동무기와 불의 전차와 같은 우수한 군사 기술로 무장한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힉소스는 '이국인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로마 시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는 이 힉소스를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어떤 민족으로 형성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합니다.

    이 힉소인들은 제 13 왕조와 제 14 왕조를 차례로 평정하고 제 15 왕조를 시작하는데요.

    힉소스인 왕들이 100 년 정도 존속한 이 시기를 제 2 중간기라고 합니다.

    그들이 사용한 전차와 강력한 화살, 갑옷과 금속 투구등은 이집트인들이 후에 정복 전쟁을 떠날 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혁명에 가까운 군사기술을 도입한 반면 야만적인 통치로 이집트 내에 큰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제 17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모세가 힉소스를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감행했고, 카르낙의  아문 대 신전에 2개의 전승 기념 석비를 세웠습니다. 허나 3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을 거친 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고 카모세의 동생 아흐모세 1세가 제18왕조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나이는 10살 밖에 안 되었기에 어머니 아호텝이 대신 섭정을 맡았고, 성년의 나이가 되자 아흐모세 1세에게 전권을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아흐모세 1세는 재위 18~19년차에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포위하고 정복하였으며, 힉소스인들을 이집트에서 몰아냈습니다. 

    이로써 기원전 1567 년 고대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인 신왕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집트의 황금시대

    왼/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오/투탕카멘의 황금 왕자

    이집트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신왕국 시대는 힉소스족과의 전쟁을 통해 싸우는 방법과 군사기술을 터득하여 강력해졌습니다.

    신왕국시대의 왕들은 영토 확장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힉소스인들에게 침량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이집트인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서아시아로 정복 전쟁을 떠났습니다. 

    3대째의 투트모세 1세는 누비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시아를 원정하면서 널리 이름을 떨칩니다.

    이로써 이집트인들은 자존심을 회복했고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왕국 시대의 유일한 여왕인 하트셉수트는 군사적 힘이 아닌 무역을 통해서 이집트를 확장해 갔습니다.

    광범위한 무역으로 시야가 넓어진 이집트인들은 바깥 세계를 더 자세히 이해하게 됐고 모두들 풍족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트셉수트와 공동 통치자였던 투트모세 3세는 뛰어난 전사였는데요.

    하트셉수트가 죽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이집트 통치를 시작하였고, 최소 17차례에 달하는 대원정을 펼치면서 이집트 왕국의 영토를 역대 최대 규모로 넓혀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을 건설합니다.

    또한 투트모세 3세는 그 어떤 파라오들보다 신전 건축에 공을 들였습니다.

    50여 개에 달하는 사원들을 지었다고 전해지나,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거대한 신전은 카르나크 신전으로 천수백 년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신전을 통해 이집트 전성기의 신과 왕이 누렸던 권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 이집트하면 미이라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이 시기 오랜 기간의 시행 착오 끝에 미이라 제작 수준이 높아집니다.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와서 부활할 수 있도록 육체를 정성스럽게 보존했습니다.

    거의 5천 년 역사에 달하는 미이라 제작은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독특한 전통이자 인류의 유산입니다.

    한편 이집트의 거의 모든 왕이 숭배하던 신은 아몬 신이었는데요.

    '아멘호테프 대제'라고 칭송해 불린 아멘호테프 3세로부터 강력한 제국을 물려받은 아멘호테프 4세는 정치와 종교 면에서 과감한 개혁을 시행합니다 .

    아몬 신을 버리고 아톤을 숭배하기로 한 아멘호테프 4세는 이름도 '아톤신에게 봉사한다'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바꾸고 수도도 아마르나로 옮겨버립니다. 다신교에서의 전통에서는 이단이라고 하는 아마르나 시대를 만듭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오로지 아톤신에게 기원하여 그 가호로 국력의 회복을 원하는 평화주의자였던 아멘호테프 4세의 시정 방침은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국제 정세에 적합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불만의 소리가 커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아멘호테프 4세는 가신에게 배반당하고 사랑하는 왕비(네페르티티)와도 별거하여 실의 속에서 죽어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기원전 1351 년 아크나톤 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투탕카멘은 아몬 신관의 세력에 못이겨, 즉위 후 다시 아몬을 이집트 최고의 신으로 삼고 수도도 테베로 다시 옮겼습니다. 테베의 구세력, 더욱이 아몬 신관들의 권력이 얼마나 강대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투탕카멘은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18세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재위 기간도 짧고 나이도 어린 왕이였기에 유명세에 비해 큰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투탕카멘이 이집트 파라오 중 가장 유명한 이유는 1992년 영국인들에게 발견된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묘가 발굴되었기 때문인데요. 그의 무덤 속에는 손타지 않은 수많은 보물이 보존되어 있었고 미이라가 된 투탕카멘의 얼굴은 황금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투탕카멘의 머리 한쪽은 뭔가 로 세계 마다 뼈가 으스러져 있었는데 학자들은 투탕카멘이 암살당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소년왕 투탕카멘이 죽자 당시 사실상의 실세이자 재상이었던 아이가 투탕카멘의 아내 안케세나멘과 결혼하며 파라오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즉위 당시 엄청난 고령이었던 탓에 4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장군 호렘헤브가 국민의 요청에 응하여 즉위하여 아문의 신전을 복구하는 동시에 군대를 개혁하는 등 14년 정도의 통치 기간 동안 나름 많은 일을 하며 이집트를 완전히 아크나톤 이전 시절로 되돌렸습니다.

    호렘헤브는 기원전 1292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당시 재상이였던 파람세스가 람세스 1위로 즉위, 제 19왕조를 시작하게 되면서 260년 가까이 지속된 제18왕조가 막을 내립니다.

    &

    이집트 태양왕 람세스2세

    카데시 전투 - 이집트 (녹색), 히타이트 (적색). 경계선에 있는 도시가 카데시다.

    고왕국시대에는 범접할 수 없는 웅대함과 신비함이 있었다면 신왕국시대에는 사상 최대의 국토와 화려하고 정교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1318년 시작된 제 19왕조 에는 신왕국 전성기의 대표 파라오인 람세스 2세가 있었습니다.

    19왕조 전체의 존속기간이 110년인데, 세번째 파라오인 그의 재위 기간은 66년이나 됩니다.

    재위 기간이 길었던 만큼 많은 조형물을 세웠는데요. 자신의 기념물을 이집트 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많이, 구석구석까지 세웠습니다.

    대표적으로 네 개의 거대한 좌상이 있는 아부심벨 신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건축역사상 처음으로 산에 지은 건축물로 20미터 높이의 거대 조각상 4개는 모두 람세스 2 세를 조각한 것입니다.

    그 외에 룩소르 신천, 카르나크 신전의 라메세움 등에 거대한 석상이 남아있습니다. 고왕국의 쿠푸나 카프레가 아주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기념물을 남겼다면, 람세스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도록 기념물로 국토를 채웠습니다.

    스스로가 한껏 자화자찬했던 필생의 업적은 내정보다 외정에 있었는데요.

    람세스2 세 는 재위 5년째의 해 아시아의 새로운 강적인 히타이트에 맞서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인 아시아 출병에 나섭니다.

    두 나라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데 그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카데시 전투였습니다.

    16년간 전쟁을 계속하던 두 나라는 결국 강화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강화 조약이 되었습니다.

    이 강화 조약의 국제정치적 효과는 대단하여, 이후 40년 동안 오리엔트 세계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람세스 2세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야기 때문일겁니다.

    66년간 이집트를 통치하며 여러 아내와 많은 자식을 얻었는데요. 그 숫자가 몇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학자들은 최소 6명의 정부인과 첩은 수십명인걸로 추정하며, 자녀의 숫자는 85명~400명까지 추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한 여인은 18왕조 파라오인 아이의 증송녀, 또는 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방계 혈족으로 추정되는 '네페르타리' 였습니다. 그녀를 몹시 총애한 람세스는 아부심벨에 그녀를 위한 작은 신전을 지었으며, 왕비의 무덤으로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파라오 영광의 최후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고대 이집트는 힉소스, 바다 민족, 히타이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의 침략을 받았는데요.

    그 중 바다 민족의 침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고 제 19왕조 시대에는 그들의 세력이 꽤나 커져있었습니다.

    제 19 왕조가 왕위 계승 문제로 붕괴하고 제 20 왕조가 들어서니 리비아와 바다민족은 호시탐탐 이집트를 침략하는데요.

    다양한 전략으로 침입자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이 싸움으로 이집트는 비용과 인력을 너무 많이 낭비했습니다.

    제 20 왕조 후기 왕권은 전쟁 후유증으로 비실되고 있었고 정복 지역들은 이 틈을 타서 하나 둘 독립을 선언합니다 .

    신왕국시대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빛나는 시대였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화려한 시절은 점차 무너져 갔고 5백 년의 번영을 누리던 신왕국시대는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약체화한 이집트 군대를 지탱하고, 국토 방위에 기여한 것은 리비아인, 뉴비아인 등의 외인 용병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용병을 가진 외운 수장의 세력이 강성하게 되어 그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제 22~24왕조는 리비아인, 제 25왕조는 이디오피안이 세운 왕조입니다.

    거의 4 세기 동안 외국인의 지배를 받던 혼란에 시기가 끝나고 이제 이집트는 후기 왕조시대로 진입합니다.

    그리스인 용병의 도움을 받아 아시리아군을 추방하고 간신히 독립에 성공한 제 26 왕조는 침체된 이집트를 발전시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합니다. 이 때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최초로 시도해서 후대 사람들이 수에즈 운하를 만드는 데 기초를 다집니다.

    기원전 525년, 드디어 파국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적군인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략하고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의 도시로 선포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의 신앙을 멸시했던 반면에 페르시아의 또 다른 왕인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의 신들을 존중해줍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 를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운하 작업을 다시 시작하는데요.

    84 Km에 달하는 운하가 완공되기까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이집트인 12 만 명이 죽어나갑니다.

    페르시아의 가혹한 통치에 지친 이집트인들은 끝없이 독립을 위해 투쟁했는데요.

    저항에 실패하자 이제는 차라리 다른 나라가 페르시아를 무너뜨려주길 바랍니다 .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타나 페르시아를 무찌르면서 이집트는 드디어 페르시아의 통치에서 벗어납니다.

    기원전 332 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해방해주는데요.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열렬히 환영하고 대접해줍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해주었고 이집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를 왕으로 섬겼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포함한 제국 전역의 헬레니즘 시대를 열어갑니다.

    헬레니즘시대란 고대시대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이 절정에 다른 시기를 뜻합니다.

    이집트의 문화는 점차 개조되었고 이시기 지중해에 자리한 알렉산드리아는 수백 년간 지중해의 중심지가 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그의 최측근이던 프톨레마이오스1세가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는데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와 그리스의 문화를 결합해 발전시켰고 이집트의 전통도 존중해주면서 3백 년이나 통치를 지속합니다.

    기원전 288년,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부터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100여 미터 높이의 파로스 등대까지 세워지니 이집트는 당대 최고의 선진 문명을 이룩하게 됩니다.

    하지만 통치말기에 이르러 왕실 내부의 정변이 일어나고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이집트인들이 수차례 폭동을 일으키는데요.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동맹국 로마에 의존하게 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는 권력을 위해서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를 사로잡았고 그가 죽은 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왕위 와 이집트의 독립을 다시 지켜내는데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공격에 무너지자 극도로 절망한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택하니 이제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명맥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합니다 .

     

    이슬람의 지배와 종교적 전환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서 제국의 밀과 파피루스 등을 끝없이 공급했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이집트에도 기독교가 융성합니다 .

    반노예상태로 살아가던 이집트인들은 끝없이 폭동을 일으켰는데요. 로마가 이집트를 동화시키는 데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처럼 이집트의 신들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로마 제국이 쇠락해갔고 641년 이슬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합니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큰 변화를 맞이하는데요.

    전통 문화에 로마,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까지 뒤섞이면서 현재 이집트 문화의 뿌리를 다지게 됩니다.

    이슬람제국은 이집트의 종교에 딱히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집트인들도 이슬람 제국에 딱히 반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를 지배한 아무르는 아름다운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이슬람 제국 으로 가는 길이 두절되니 결국 멤피스 근교에다가 푸스타트라는 신도시를 세우게 됩니다.

    푸스타트는 행정수도 겸 상업중심지로서 이후 3세기 동안 이집트의 수도 역할을 담당합니다.

    시간이 흘러 이집트는 이슬람제국의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시대를 거치게 됩니다.

    아랍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집트의 정착하는데요. 이집트의 기독교 신자였던 콥트 교도들은 아랍인과 경쟁에서 지배계층에 오르기 위해 아랍어를 배우고 기존 종교를 버려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니 아랍어와 이슬람은 이집트인 다수의 언어와 종교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집트의 극심한 기근이 들어 군사력이 약해지자 튀니지에 세워진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차지합니다 .

    파티마 왕조는 자신들과 같은 알리의 후손만이 이슬람의 지도자인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파티마 왕조는 독자적인 칼리파 제도를 운영하면서 이집트를 넘어 시리아와 시칠리아까지 정복해 나갔고 결국 중동은 서부의 파티마 왕조와 동부의 아바스 왕조 로 양분됩니다.

    969 년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를 새 중심지로 삼고 요새 도시 카이로를 세워 수도로 삼습니다.

    카이로가 점차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이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알 아즈하르가 세워집니다.

    번영을 누리던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 전쟁에서 받은 타격으로 쇠락하다가 살라딘에 의해 멸망합니다.

    1169 년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를 열고 카이로를 수도로 정하는데요.

    십자군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맘루크 군사들이 맘루크 왕조를 세워 아이유브 왕권을 정복합니다.

    이로써 1250년 노예가 세운 이슬람 왕조인 맘루크 왕조의 시대가 열립니다.

    맘루크 왕조는 독특한 권력 계승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1492 년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매일 만명 이상이 죽어 나갔고 맘루크 왕조 말기에 과도한 세금과 왕실의 사치가 반복됐으며 1516 년에는 오스만 터키 군의 공격을 받고 다음해 무너집니다.

    이제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에 속주가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약해지면서 남아있던 맘루크 들이 득세하게 됐는데요.

     

    이집트의 근대화와 현대 이슬람주의의 출현

     

    1798 년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이집트가 잠시 프랑스 영향권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짧았던 프랑스 점령기간에 민중혁명사상이 이집트로 흘러들었고 이집트의 민중들이 자립을 위해 봉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이집트와 아랍 근대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나타납니다.

    1805년 알바니아 사령관인 무하마드 알리가 이집트 민중의 혁명과 지지를 등에 업고 총독이 된 겁니다.

    그는 군대를 기반으로 대대적인 근대 개혁을 단행했고 이 노력은 그를 근대 이집트의 아버지로 만들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1250년부터 이집트를 지배해온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 나갑니다.

    1869 년 바다와 바다를 있는 세계 최대의 운하인 수에즈 운하가 화려하게 개통됩니다.

    하지만 무리한 강제노역으로 인해 수많은 이집트인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죽어갔고 정부는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수에즈 운하를 탐내던 영국 에게 주식을 팔아야 했는데요.

    수에즈 운하의 경영권을 쥐게 된 영국은 점차 이집트 내정에 깊게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1914년 영국은 이집트를 왕령 식민지로 병합하려 합니다. 이집트인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됐지만 이집트는 영국의 완전한 보호령이 됩니다.

    이때 세계에 불어닥친 민족자결주의 열풍으로 이집트의 격렬한 독립운동이 일어나는데요.

    19019 년 영국의 자국 통치에 분노한 이집트인들이 독립혁명을 일으키면서 1922년 마침내 이집트 왕국 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1936 년에도 수에즈 운하에는 영국군이 계속 주둔한 상태였고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계속해서 영국의 끌려다니면서 독립국의 지위를 거의 누리지도 못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뗐고 이제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서로 가지려고 싸우는데요.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요르단이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공격을 개시하니 이른바 제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전력의 이스라엘 군과 영국식 교육을 받은 아랍 5개국 정규군의 싸움은 언뜻 봐도 게임이 안 될 것 같지만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군은 절박감이라는 최종병기로 결국 두 도시를 지켜냈고 아랍 연합군이 서로 간의 불신으로 분열되면서 결국 패배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국왕 파루크 1 세는 사치에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패전국이 된 상황에서 나라가 이래저래 시끄럽습니다.

    이에 1952년 이집트 군인출신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1956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이제 이집트의 군주제는 사라지고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세르는 영국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는데요.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선박통과를 금지당해서 뿔이 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1956 년에 일어난 제 2 차 중동전쟁 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신들과 상의도 없이 과격한 전쟁을 벌인 3 국의 분노했고 유엔의 중재로 1957년 전쟁이 종결됩니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나세르를 중심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단결하게 됩니다.

    1958 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한 나라로 합쳐 아랍 연합 공화국 이 되는데요.

    서로 다른 국가의 통합 운영으로 문제점이 발생했고 1961년 시리아의 독립 선언으로 나라가 다시 분리됩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뒤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는데요.

    이것이 6일 전쟁이라 불리는 제 3 차 중동전쟁 입니다.

    1971 년 나세르에 이어 안와르사다트가 대통령이 됩니다.

    사다트는 잃어버린 수에즈 운하 동쪽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해 이를 갈고 복수를 계획하는데요.

    이 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의 석유 수출국기구인 OPEC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줄이고 원유 가격을 인상하면서 전 세계적인 오일쇼크를 일으키게 됩니다.

    1981년 사다트는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부통령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어 30년간 철권을 휘두릅니다.

    2011 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민주주의로 세워진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하지만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이 계속 대립하는데요.

    결국 집권 1 년 만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주의 무르시 정권이 축출됩니다.

    2014년 세속주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엘시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이집트를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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