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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최초의 문명 -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
    카테고리 없음 2023. 4. 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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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체계의 많은 것들은 약 6천 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에서 발원했습니다.

    문자와 바퀴, 최초의 학교, 의회, 법전, 건축, 의학서 등등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또 당시 쓰인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서는 명예, 우정, 생로병사 등 고차원적 사유가 흥미진진한 서사에 담겨 전개되었는데요.

    이처럼 단번에 수준 높은 문명이 뚝딱하고 나타나다 보니 많은 이들이 수메르의 외계 문명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수메르에서는 도대체 어떤 역사적 과정이 있었길래 이런 최초이자, 최고의 문명이 뚝딱하고 만들어졌는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수메르의 시작

    일단 수메르는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역인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을 가리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우리가 학창 시절 지겹게 들었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해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땅을 말하는데요. 

    이곳 땅은 두 강의 상류에서 실어온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충적토이자 비옥토였습니다.

    여기에 기원천 6천 년 경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보리와 밀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이 수메르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수메르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기원은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수메르인들이 정착한 후 1천 년이 흐른 기원전 5천 년 경 이곳에서 '에리두'라는 최초의 도시가 생겨납니다. 

    에리두는 풍요로운 땅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토기를 만들어 적극적 상업과 교역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에리두를 필두로 수메르 지역에 하나둘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도시들이 생겨난 후 천년이 지나자 에리두의 전성기가 지나고 키시와 우르크라는 두 도시가 수메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 끝에 우르크가 키시를 누르고 수메르의 패자가 됩니다. 이때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이 바로 우르크 5대 왕 '길가메시'였습니다.

    길가메시는 단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영웅담이 오랫동안 수메르지역에서 전승되면서 3/2가 신이고 3/1이 인간인 길가메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르크, 자연을 극복하고 교역을 시작하다

    그렇게 길가메시 이후로 기원전 4천 년 경 우르크가 수메르 지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기원전 3천 년 경부터 우리가 아는 수메르 문명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성기는 풍요로움이 아닌 치명적인 위기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기온이 급상승하고 강수량이 감소해 두 개 강의 수위가 낮아진 겁니다.

    동시에 농사의 젖줄인 습지와 개울이 말라 붙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수메르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가장 큰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농사와 정착의 길로 들어선 인류는 수천 년간 이어온 터전을 쉽사리 떠나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떠나지 않고 최대한 해결을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해결책이 바로 관개시설 구축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각자 마을에서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물길을 내 농경지에 물을 댔습니다.

    그러나 이 소규모 관개시설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여러 촌락이 연합해 대규모 운하를 만들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천수에 의존하지 않는 인공 농업이 시작된 겁니다. 그렇게 수메르는 협력을 통해 자연재난을 극복한 최초의 문명이 됩니다.

    이런 대규모 관개시설을 구축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하고 운하로 끌어들인 물을 아무 잡음 없이 골고루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단순히 왕이나 대사제뿐 아니라 그들을 중심으로 한 행정 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관리자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체계화에 돌입한 수메르 도시들은 인구 집중과 도시 특유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급격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괭이로 땅을 파던 것을 소를 이용한 쟁기로 땅을 쉽게 갈아엎을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경작지가 넓어지고 농업기구가 발달하니 수확물이 늘어났습니다.  이를 손쉽게 옮기기 위해 바퀴가 생겨났으며 소를 이용한 짐수레가 만들어졌죠.

    또 생산량이 먹을 양을 초과하여 남은 잉여 생산물을 썩히지 않고, 다른 도시와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먼 곳까지 많은 물자를 나르기 위해 돛을 발명해 범선을 만들어 바닷길을 열었고, 이왕 바닷길이 열렸으니 물레를 이용해 대량으로 도기를 제작해 내다 팔고 수메르 지역에 모자란 나무와 광석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구리와 주석을 들여와 청동기를 만들었으니 이때부터 청동기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검의 발명, 전쟁의 시작

    우르크에서 도시화가 시작된 이후 기원전 3000년~2500년경 수메르 지역의 80% 이상이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는 직업의 종류가 농민에 국한되지 않고 수십 수백 개로 다양해졌으며 단순 친족집단을 넘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가장 큰 도시 우르크에는 인구가 5만 명이나 됐습니다. 이렇게 도시 내부적으로는 네트워크의 안정화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청동을 재료로 검이 발명되고, 이는 오로지 싸움을 위한 고급 살인도구가 생겨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검의 발명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물레와 짐수레에 쓰였던 바퀴가 군사용 전차에 이용되었고, 그렇게 전쟁 준비는 기계 문명을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도시들은 너도나도 성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피땀 흘려 일하는 것보다 다른 지역에 침입해 물자를 빼앗는 것이 다른 공동체보다 앞서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한 개인의 용기와 리더십을 시험할 기회였으며 이때 두각을 나타낸 자는 다른 이들보다 권력의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세습 왕조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은 도시들은 점점 큰 도시로 병합되면서 전쟁 포로가 생겨났고 노예를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노예 경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도시는 공동으로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제도와 기술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나 기술은 소수 지배계급의 효과적 통치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피지배 계급의 강제노동과 전쟁동원 그리고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도시 생활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이들이 현실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데올로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입니다.

     

    수메르의 종교

    서로 모르는 대규모의 사람들을 관개시설을 구축하는데 동원하고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 나가게 하며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단 몇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했을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스스로 시스템에 복종하게 한 것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종교는 통치 세력에게도 필요했지만 공동체 구성원끼리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존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는 만큼 최소한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했고, 그 연결 고리가 바로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의 믿음을 저버렸을 시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도덕의 강제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범위한 협력 네트워크는 그렇게 종교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상이 실제를 만든 것이죠.

    수메르 사람들은 일찍부터 자연에는 인간을 넘어선 위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홍수와 가뭄이 인간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좌우했기에 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자연 숭배 사상을 낳았고 특히 농사와 관련된 여러 신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신이 늘어가다 보니 어느새 2~3천 명 정도의 신이 생겨 다신교 체계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각 도시마다 수호신을 섬겼고 도시 한가운데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고운 점토가 넘쳐났던 수메르인들은 이 흙을 1천도 이상의 가마에 구워 건축에 이용했습니다. 특히 평평한 토단위에 벽돌로 신전을 높게 세워 홍수에도 끄덕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부릅니다.

    지구라트는 '높은 봉우리'를 뜻합니다. 벽돌단 위에 벽돌단을 쌓아 계단식으로 연결했으며 그 꼭대기에 사원을 올렸습니다. 

    수메르인들은 마치 하늘에 닿는 것이 목표인 양 신전을 점점 높이 쌓아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30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구라트는 일정 시기 한 도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민족이 건조한 것입니다. 그만큼 형태도 다양합니다.

    아마 이 지구라트가 이후 피라미드 건축에 영향을 끼쳤지 않을까 라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도시 국가에서는 이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도시생활 전체가 돌아갔습니다.

    지구라트 사원에는 사제가 있었고 의식에 사용되는 각종 도구와 악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지구라트는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행정 기능도 있었는데요. 도시 전체의 식량 분배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생산물은 신의 소유였기에 각 마을에서 추수한 곡식은 지구라트에 모였고, 이 곡식은 각 도시의 원칙에 따라 분배되었습니다.

    대부분 신분에 따라 분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신분의 꼭대기에는 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모든 토지를 관리했고 그 아래 신관과 군인이 지배층을 형성했으며 평민과 노예가 피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이 계층 구성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또 지구라트는 여러 전문직 사람들이 속해 있었는데 제빵사, 방직공, 이발사, 보석상, 세탁부, 화가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손글씨를 직업으로 하는 필경사가 있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수메르 문명의 문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의 발명

    수메르 문명에서 발생한 인류 최초의 문자는 '수량'을 표시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숫자가 없던 당시에는 자신이 수확한 곡물이나 가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진흙을 빚어 표시했는데, 이것을 '물표'라고 합니다.

    기원전 8천 년 경부터 사용된 각기 다른 모양의 물표들은 농산물이나 가축과 대응됐습니다.

    가령 구 모양의 물표는 곡식, 세모는 동물, 원반은 하루 노동량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도시가 발전할수록 물표에 대응하는 생산물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직물이나 금속, 빵, 맥주 등이 발명될수록 물표도 따라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12개 정도에 불과했던 물표가 우르크 시대로 넘어가면서 350 종류로 늘어나게 됩니다.

    결국 수메르인들은 물표와 대상의 일대일 대응의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진흙 위에 복잡하고 추상적인 기호를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최초로 기록된 이름이 있는 영수증 (점토판)

    이 점토판은 기원전 2600년경 농부가 자신이 수확한 보리를 신전에 맡기고 받은 영수증입니다.

    29,086자루의 보리를 37개월에 걸쳐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쿠심이라는 회계 담당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이름이 이 금융거래 영수증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메르인들은 점차 복합한 상징체계를 공유하기 시작했고 이는 문자와 숫자 형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날카로운 갈대로 점두에 문자를 새기는 쐐기문자를 발전시켰고 이를 설형문자라고도 합니다.

    이제 수메르에서는 온갖 것들이 점토판 위에 새겨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대개 상업 거래, 토지 매매, 보수 지급 등 경제행위를 다루는 문서가 주를 이뤘고, 그 증거로 우르크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대부분 경제행위가 이루어졌던 지구라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수메르 전역에는 학교가 있었고 공식적으로 문자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문자의 발명은 수메르의 경제 체계를 더욱 고도화했고 이는 사유재산 확립과 계급화를 더욱 촉진해 복잡한 사회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인간의 기억 용량의 한계를 문자로 극복한 첫 사례였습니다. 이제 세금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현제 국가의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미래의 기대 자원과 그에 따른 인구 증가를 예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도시국가별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왕국 더 나아가 제국으로 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 가능성은 더욱 잦은 국가 간 전쟁을 불러오게 됩니다.

     

    아카드 왕국의 탄생

    기원전 2900년~2800년경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수메르 지역을 덮였습니다. 이에 에덴이라고 불리는 비옥토를 차지하기 위해 도시국가 간 치열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르크는 점차 쇠퇴했고 라가시와 움마라는 두 도시 국가가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도시는 약 250년간 전쟁을 이어갔고 마침내 '루갈자게시'의 활약으로 기원전 2359년 움마가 수메르의 최종 패자가 됩니다.

    한편 움마의 속국 키시에 '우루자바바'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르곤이라는 충직한 부하가 있었는데 사르곤은 북쪽에서 온 이방인이었습니다.

    키시라는 도시 자체가 남북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만큼 수메르인뿐만 아니라 불족에서 온 이주민이 섞여 살고 있었는데, 이 이주민들을 셈족인 '아카드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셈족은 오늘날 아랍인이나 유대인처럼 셈어를 쓰는 민족을 가리킵니다.

    사르곤 또한 이 셈어를 쓰는 아카드인 이였는데요. 그는 군주인 우르자바바를 제거하고 키시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군해 루갈자게시를 죽이고 수메르 전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르곤은 여러 도시 국가를 하나로 묶어 기원전 2334년 아카드 왕국이라는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합니다.

    사르곤은 기존 수메르 통치자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의 자리를 보장해 줬습니다. 또 수메르인들의 종교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융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다만 언어만은 수메르어가 아닌 아카드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습니다.

    그렇게 수메르 지역의 아카드어 문서가 점점 늘어나고 셈어인 아카드어 DNA는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면면히 이어지게 됩니다.

    아카드 왕국은 약 20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수시로 수메르인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혹독한 가뭄이 또 한 번 찾아왔으며 결정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동쪽 자그로스 산맥에서 온 구티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2130년 아카드 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메르 지역은 자신들이 야만족이라고 부러던 구티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티족은 딱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100여 년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의 부활 - 우르 3 왕조

    2112년 수메르인들이 구티족을 몰아내고 다시 한번 수메르 지역을 통일합니다.

    이를 우르의 우르-남무가 개국한 우르 3 왕조라고 부릅니다.

    우르-남무는 최초로 사회에 '정의'라는 관념을 주입시킨 왕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최초의 법전 '우르-남무 법전'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법전에서는 부패 관리를 단속하고 공정한 도량형 제도를 관리하며 고아나 과부를 보호하는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르-남무 법전은 300년 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토대가 됩니다. 이렇게 우르-남무가 사회 정의에 관한 관념을 세웠다면 그의 아들 슐기왕(재위 BC2047~1999) 때의 수메르 문명은 문화적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슐기왕은 48년의 재위기간 동안 학교를 세우고 필경사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수메르어로 전해지던 찬미가를 정리해 기록했습니다. 

    그 박에 현재 가장 보전이 잘 되어 있는 달의 신 '난나'를 모시는 지구라트와 황금 투구, 악기, 보드게임 등이 모두 우르에서 발굴되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만든 '우르의 깃발'이라는 장식품이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르 3 왕조의 이러한 번영도 잠시 기원전 2004년 오늘날 이란 지역에 살았던 엘람인의 공격으로 수메르인이 세운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수메르 지역에서 엘람인을 몰아낸 것은 유목민이자 셈어를 쓰는 아모리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이었는데요.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아시리아 제국을 비롯해 수많은 민족들이 거쳐가게 됩니다. 이들은 물리적으로 수메르 지역을 차지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메르 문명의 전파자가 되고 맙니다.

    다양한 종족들은 수메르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자, 관료제도, 종교, 법률, 건축 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수메르적 생활 방식을 후대에 전해 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메르 문명은 최초이자 최고의 문명으로 인류의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상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문명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수메르 문명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문명 중 하나이며, 인류의 발전과 성취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업적은 우리가 현재 누리는 세상의 기초가 되는 것들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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